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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 벚꽃심기 과연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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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365
등록일
2018-01-03 13:26:51
내용



작금의 현실

이 땅의 벚꽃 역사는 아예 미지의 세계다. 일제 패망 이후 그 많던 벚꽃이 왜 자취를 감췄고 어떻게 다시 부활했는지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일제시대 이땅엔 벚꽃이 지천에 깔려있었다. 일본이 민족사상을 말살시키고 일본 문화정책을 펼치기 위하여 공원이나 학교 등 전국 방방곡곡에 심어져 있는 무궁화를 뽑아 불태워 버리고 벚꽃을 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전국이 벚꽃은 일본의 상징이라하여 베어져 나갔다. 광복과 함께 거리의 벚나무는 베어졌다. 조선 대중의 분풀이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 이땅의 전국 방방곳곳엔 다시 벚꽃이 지천에 깔리게 되었다. 일본이 다시 심은걸까? 아니다. 우리 스스로 가 다시 심었다.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의 상징이라 하여 모두 베어냈던 것을 이제 전국의 지자체가 앞 다투어 벚꽃을 심고 축제를 열다 보니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닌 벚꽃 삼천리 화려강산이 되버렸다.
우리나라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인가? 벚꽃 삼천리 화려강산인가?’ 하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왜냐면, 전국의 지자체가 앞 다투어 벚꽃을 심고 축제를 열다 보니 전국토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사이 아닌 벚꽃 삼천리 화려강산이 되버렸다. 무궁화가 나라꽃(國花)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되어 있으니 대한민국은 ‘무궁화 삼천리’가 당연한 말이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 되어 있어야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의 꼴을 보자면 이젠 바꿔야 할 판이다. 지자제와 여타기관에서 벚꽃 심기에 예산을 ?아붓고 있다. 봄의 전령사 사쿠라라며 대한민국 삼천리 방방곡곡에 심어놓고 아예 일본본토 사쿠라상품까지 부채질하고 있다. 지자체에 벚꽃나무는 분포도 개화시기 자료가 상세하지만 무궁화는 아예 관련 자료도 없다, 방송도 언론도 벚꽃 개화를 기준으로 날씨 방송을 한다. 이쯤 되면 이나라의 국화는 무궁화가 아니라 분명 사쿠라다. 이러다 대한민국 애국가 가사를 무궁화 삼천리가 아닌 벚꽃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바꿔야 할 판이다. 대한민국 국화 무궁화는 화장실 앞에서 학대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전국의 지자체는 앞다투어 사쿠라축제에 목을 메고 국민혈세를 쏟아붇고 있다. 청와대 뜰과 국회안 잔디에는 무궁화가 몇그루 있는가? 대한민국은 지금 사쿠라를 삼천리 방방곡곡에 심어놓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 축제를 연습하고 있는가? 


일본은 왜 벚꽃을 기증했나 

이땅에 상륙한 벚꽃나무는 해방 이후 뿌리째 뽑혀 나가는 ‘청산’ 대상이었지만 1960년대 들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진해 벚꽃도, 군산가도의 벚꽃도 뽑혀나간 자리에 다시 심고. 국회 주변에도 뿌리내렸다. 박정희 정권 당시 재일교포와 일본인이 대거 기증에 나선 결과였다. 일본의 기업인, 언론인 등 영향력 있는 일본인과 일본 기업들이 기증에 참여했다. 이렇게 거의 모두 영향력 있는 엘리트 그룹이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국회뒷길에 심긴 벚나무는 1971년 기증된 것인데 기증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일친선협회”라고 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이후 국내 곳곳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벚꽃(벚나무) 심기'에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은 거액을 들여 일본에서 벚꽃 묘목(苗木· 옮겨 심기 위해 가꾼 어린나무)을 비행기로 실어 날라 기증했을 뿐 아니라 진해의 경우 일본인 식물학자 등이 이후 자발적으로 수차례 방한해 비료를 주고 성장상태를 파악하는 등 정성을 쏟은 것으로 확인됐다. 결론적으로 기증의 순수성을 찾을 수 없다. 반성과 사과가 전제 되었다면 한일친선의 의미는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과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벚꽃과 일본


일본은 벚꽃을 국화로 정한 바 없다. 그러나 일본의 나라꽃인 것도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의 상징이 된 게 아니다. 벚꽃엔 일본의 천년 역사가 녹아 있다. 고대 농경사회부터 벚꽃은 일본 대중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농민들은 벚꽃이 피면 모내기를 준비해야 할 때임을 알았고 벚꽃으로 쌀의 수확을 점쳤다. 벚꽃을 소재로 사랑과 젊음, 생명을 노래하기도 했다.벚꽃은 오래전부터 일본의 문화적 내셔널리즘의 상징이었다. 이미 9세기경 중국인과는 다른 일본인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었다. 1천여년 전부터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일본 대중의 삶에 깊숙이 침투한 벚꽃의 다양한 이미지가 축적되면서 일본 특유의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였다. 9세기경엔 귀족들도 찬미하던 매화를 버리고 벚꽃을 즐기기 시작했다. 매화는 한국인들이 즐기던 꽃이다.  중국문화권에서 벗어나 일본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일본인들의 벚꽃 사랑은 각별하다. 전전(戰前)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의 첫 문장은 ‘피었다 피었다 사쿠라(さくら·벚꽃)가 피었다’였다. 봄을 노래하는 동요에서도 사쿠라가 빠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봄=사쿠라’라고 배운다. 벚꽃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며 그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 너무 깊이 간직되어 있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대표하는 꽃이다. 
아울러서 거의 동시에 피었다가 일제히 져 버리는 특징 역시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벚꽃 가지를 꽂고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죽음’과 ‘산화’를 떠올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사무라이의 ‘할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정신이자 사실상 ‘일본의 나라꽃’” 이다. 2차대전 당시 지휘관이었던 나카가와 구니오(中川州男) 대좌(대령)는 본부에 ‘사쿠라 사쿠라’란 최후 전문을 보낸 뒤 자살했다. 전문의 사쿠라는 ‘일왕과 일본을 위해 죽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37년 미국에서 발행된 책, ‘Japan, Korea and Formosa’는 “8세기 이후 벚꽃은 일본의 국화였다. 9세기부터는 천황이 벚꽃축제를 열어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근대 역사에서 특히 벚꽃은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일본 군사정권은 벚꽃을 영토 확장의 상징으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벚꽃은 식민지에 꽂혀 일본제국령을 알렸고, “천황을 위해 사쿠라꽃잎처럼 지라”는 레토릭이 젊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벚꽃은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벚꽃 가지를 꽂고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죽음’과 ‘산화’를 떠올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사무라이의 ‘할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정신이자 사실상 ‘일본의 나라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벚꽃은 단순히 나라꽃이 아니라 정치·군사적 꽃으로 변질됐다. 군사정권은 벚꽃의 상징성을 식민지 전쟁에 적극 활용했다. 상징 조작의 밑거름은 이미 일본 벚꽃 역사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희노애락과 같은 인간 관계와 인생의 과정이 이미 거기에 담겨 있었다. 군사정권은 이 같은 풍부한 벚꽃의 상징성을 정교하게 재구성하고.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벚꽃의 낙화는 ‘천황을 위한 전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일본 가미가제가 대중에게 각인됐다. 벚꽃은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일제는 벚꽃을 영토 확장의 상징으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벚꽃은 식민지에 꽂혀 일본 제국령을 알렸고, "천황을 위해 사쿠라 꽃잎처럼 지라"는 레토릭이 젊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벚꽃을 찬미했다. 국가적 행사를 기념할 때면 벚나무 심기를 빼놓지 않았다.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강해질수록 벚나무 심기는 확산됐고 성 주위나 군사 훈련장에서는 예외 없이 수많은 벚꽃을 볼 수 있었다. 벚꽃은 정치·군사적 꽃이었다. 일본 군국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정책이었다. 일본 군사정권은 침략 전쟁에 벚꽃을 끌어들였다. 이데올로기를 뒤집어쓴 벚꽃은 일본과 식민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천황을 위해 사쿠라 꽃잎처럼 지라”는, 그 유명한 문구는 젊은 생명들을 앗아간 무서운 레토릭이었다. 식민지 영토에 꽂혀 일본 제국령을 알렸다. 벚꽃은 그렇게 일본 군대와 함께 행진했다. 벚꽃 기증의 의미도 이 흐름에 맞춰 해석될 수밖에 없다. 벚꽃은 여전히 군국주의로 부터 해방되지 않았다. 일본 군국주의 역사의 속죗를 털어내지 못한 벚꽃. 온전히 아름다운 자태 그대로의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조선 궁궐속의 벚꽃

1909년, 순종은 창덕궁에 머물며, 이웃한 창경궁에서 산책도 하고 손님을 맞기도했는데,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어이없는 명분을 내세워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고 벚꽃 수천 그루를 빼곡히 심었으며 창경궁의 이름을 격하시켜 창경원으로 이름까지 바꾸어 왕실의 존엄을 무참히 짓밟았다.이후 일제는 조선 영토를 벚꽃으로 장식했다. 내지(內地)화, 즉 일본의 영토화였다. 조선의 민족성을 없애려는 문화 정책이기도 했다. 일제는 먼저 창경궁을 오락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백성에게 개방했다. 그곳에 벚꽃을 심었고 벚꽃놀이를 전파했다. 왕실의 권위와 조선의 민족성을 동시에 해체하는 작업이었다.

 
진해군항제의 진실


한국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 오래된 벚꽃 명소가 많다. 사쿠라는 일본의 군인정신을 일깨워주는 정훈목(政訓木)으로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쿠라를 심었다. 지금은 여의도로 옮겨졌지만 창경궁을 비롯해 현재 해군의 요람인 군항도시 진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항제는 매년 4월, 10일간에 걸쳐 충무공이순신을 추모하고 호국정신을 기리는 정신문화 행사에 역점을 두고 육성해온 추모제전이다. 1952년 4월 13일, 우리나라 최초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우고 충무공의 얼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가 진해에서 거행되었다. 11년간 거행되온 추모제는 1963년 충무공의 호국정신과 향토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새로운 문화축제로 발전시켰고 그것이 바로 군항제다. 군항제는 이순신장군의 추모제를 비롯, 경축식이 거행되며 해군사관학교 영내 및 해군작전사령부가 개방되고 군함에 승선하는 기회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물론 지금은 해를 거듭할 수록 행사내용이 방대해져 전국적인 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벚꽃철 진해를 찾는 이들에게 관심사는 벚꽃이지 이순신 장군이 아니다. 진해의 벚꽃도 여의도 윤중로 사쿠라길 처럼 역사의 악연이 충돌하는 현장이다. 

세계적인 벚꽃 도시인 진해의 경우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의 전승지로 제왕산 꼭대기에 1929년 이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기위한 ‘일본해 해전기념탑’을 세우고 벚꽃 심기에 참여한 것이 기원이다. 한반도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힘을 겨룬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이제 일본의 대륙진출에 걸리는 상대는 부동항이 필요해 남하하려는 러시아 뿐이였다.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 들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이 가까스로 확보했던 조선에서의 우월권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일본은 조선지배를 위해선 러시아를 반드시 굴복시켜야 했다. 1905년 5월27일 새벽. 경남 진해만에 은거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일본 연합함대에 전문이 전해졌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러시아 최강 발트함대가 동해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한다. 이렇게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패권자가 된다. 이로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그 어떠한 걸림돌도 사라지게 된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일본은 1929년 일본은 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진해에 러일전쟁 승전기념탑을 세우고 가로수로 벚꽃 10 만 500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한반도를 영구 지배하기위해 진해에 군항을 만든다. 진해 군항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게 바로 오늘날 한국인들이 진해군항제라는 명칭으로 축제를 하는 진해군항제의 시작이다. 이렇듯 진해에 군항을 처음 세운건 일본인들이고 이를 기념하는 꽃도 그들이 숭배하던 벚꽃이다.  진해의 예전 이름은 웅포 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일본을 이순신 장군이 7차례나 격퇴한 지역이 바로 여기 진해다. 조선시대 조선수군의 역할을 강화한 수군 기지는 있었지만 진해에 군항이라 불리는 군사 해군기지 군항으로 만든 장본인은 우리가 아닌 이땅을 침략한 일본인들이다. 진해군항과 진해의 벚꽃은 그렇게 탄생되었다.한마디로 오늘날 한국인들 내나라 식민지 된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을 좋다고 매년 축제로 하고 있는 꼴이다. 

진해의 벚꽃은 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의 기록을 보면 1966년부터 1980년대까지 재일교포 10명과 일본의 중견 언론인, 식물학자, 관광회사 간부 등 일본인 15명, 전자회사 후지쯔, 동경항공 등 9개 일본 기업이 벚꽃 묘목 약 6만 그루를 진해시에 기증했는데 거의 모두가 일본의 영향력 있는 엘리트 그룹이며 재일교포는 이름만 빌려줬을 뿐 ‘돈을 낸 사람은 몇 안 되며, 일본인들이 진해를 방문해 거름을 주고 병충해 약도 뿌렸다 한다.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의 묘목 기증 기록과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자료에 따르면 1966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벚나무 묘목 약 6만그루를 진해시에 기증했다. 여기엔 재일교포와 일본의 중견 언론인,일본인들, 그리고 대기업이 협찬한 것이다. 진해 ‘벚꽃의 비밀’이다 또한 군항제도 어느새 벚꽃 축제라는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벚꽃은 일본 사쿠라의 대명사인 “소메이 요시노(染井吉野)“다.
우리 국민이 일제를 증오하며 잘라냈던 그 벚꽃나무를 일본에서 묘목까지 기증받아 다시 심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믈다.현재 30만여 그루 넘게 심어져 옛날보다 더한 ‘벚꽃의 고장’이 되었다.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군항제는 일본이 만든 군항과 일본의 조선식민지화에 결정적 역활을 했던 러일전쟁을 기념하기 위한 활짝 핀 벚꽃속에서 열린다. 그것도 일본인이 기증하고 정성껏 보살폈던 벚꽃이다. 이렇게 조성된 진해 벚꽃 축제와 왜적을 물리치신 이순신장군의 기리는것이 함께 열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알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다.


벚꽃은 왜 다시 심어졌나

광복이후 진해 주민들은 군(軍)시설 등 사람이 가기 힘든 곳을 제외하고 시내에 있던 벚나무를 모조리 없애버렸다. 벚꽃 도시 진해의 경우 10만 그루에 달하던 거리의 벚나무가 모두 베어졌다. 벚꽃이 부활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8,15광복 이후에 국민들이 일제를 상징하는 벚꽃이 싫어서 몽땅 뽑아 내어 아궁이 땔감으로 태워 없에 버렸던 것을 벚꽃(사쿠라)를 매우 좋아한 일군 출신 박정희(다카키 마사오)가 1961년 5.16 쿠데타 후 재일교포와 일본기업을 앞세워 다시 심기 시작하여 전국 각지의 벚꽃축제 유래가 되었다는 것은 기가 막히는 사실이다.

영향력 있는 일본인, 일본 기업과 단체가 재일교포와 함께 대거 묘목 기증에 나섰다. 벚꽃 묘목은 배로, 비행기로 다시 현해탄을 건너왔다. 진해의 벚꽃이 그렇게 부활했고 국회 주변 벚꽃길도 같은 경로로 조성됐다. 1961년 박정희 구테타 이후 벚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진해, 강변북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뒷길 등이 벚꽃나무로 조성되었다. 이 당시 벚꽃 심기 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논거는 박만규, 부종유 두 식물학자가 한라산에서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한 뒤 내놓은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라는 학설이었다. 정부와 지자체는 ‘원산지설’을 앞세워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벚꽃을 심었다, 일제 상징화 벚꽃나무가 잘리고 뽑혀나간 그 자리에 다시 심어지는 순간이었다. 


여의도 윤중로 벚꽃길의 진실

일본과 맞서 싸운 이순신장군을 기념한다며 진해에 군항제라고 하여 벚꽃을 심더니 국회 주변에도 벚꽃길을 만들었다.
여의도 국회 윤중로 벚꽃은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사쿠라 길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의 벚꽃 놀이는 일년에 단 한번 눈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기회다. 그것도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에만 삼사 일에 불과하니 결코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이 기간 동안 워싱턴에는 전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 들고 워싱턴 시 당국은 한해 관광수입의 3분의 1가량을 이때 올린다고 한다. 그야말로 효자 벚꽃이 아닐 수 없다.    

  1905 7월 도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인 1905년 7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도쿄에 파견했다. 그를 맞은 것은 일본 제국의 수상 가쓰다 다로, 두 사람은 7월 말 비밀 회동을 갖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가지고 미국은 필리핀을 가진다는 내용의 밀약을 체결한다. 바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해준, 대한제국 사망증명서에 날인해준 밀약이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그 해 11월 17일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1909 4월 백악관
 미국과 일본의 이를 기념하기 위한 2천그루의 벚나무가 일본으로부터 도착했다. 하지만 병충해 때문에 모조리 소각 당하자 일본은 도쿄 시장이 중심이 되어 2차 벚꽃 공수에 착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2년 2월 14일 12종류의 벚나무 3020 그루가 워싱턴에 다시 도착했다.오늘날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은 벚꽃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조선을 일본에 넘긴 기념으로...일본과 미국의 우정을 확인한다며... 이렇게 도쿄의 벚나무가 워싱턴으로 건너와 뿌리를 내린 지 벌써 1백년이 넘었다. 해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워싱턴의 일본 외교관들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미국 내는 물론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미일 우호의 상징 벚꽃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이 치열해 진 최근 이런 움직임은 더 긴박해졌다. 벚꽃 축제를 후원하겠다는 일본 기업들이 줄을 잇고 때를 놓칠 새라 미일 관계의 끈끈함을 확인하려는 세미나도 곳곳에서 안내 간판을 세우기 시작한다.

여의도 국회 윤중로 벚꽃길은 바로 이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사쿠라 길을 그대로 모방한것이다. 여의도 사쿠라는 1971년 기증된 것인데 기증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당시 꽃을 어디에 심을까 고민하다 미국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의 벚꽃길을 그대로 모방해 여의도에 심을 것을 제안해 1960년대 여의도 국회뒷길에 둑을 쌓으면서 이뤄졌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인들 내나라를 식민지로 넘긴걸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을 좋다고 따라하고 있는 꼴이다. 


벚꽃 원산지 논란

1961년 박정희 구테타 이후 벚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진해, 강변북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뒷길 등이 벚꽃나무로 조성되었다.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제주도임이 밝혀졌으며 이후 시민들은 벚나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됐고 이 ‘원산지설’을 앞세워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을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제주도 원산지설은 벚꽃에 대한 한국인의 불편한 감정을 희석시켜주는 유일한 근거이다. 일제가 가져다 심은 왕벚꽃은 제주도에 자생하던 것이라는 게 그 내용이다. 그러나 원산지설만으로 벚꽃은 원래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것은 몰역사적이다. 왕벚꽃나무 원산지가 제주도이므로 벚꽃은 원래 우리 꽃이라며 우기는 건 비약을 넘어 억지다. 벚꽃이란 자연은 여러 나라에 분포한다. 북반구의 아열대 또는 온대지방에 분포하는 식물이다.벚꽃 종류는 200여 가지에 이르며 국적을 따져 자랄 곳을 정할 리 만무하다.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는 물론 전 세계 아열대와 열대지방에 폭넓게 분포하는 자연일 뿐이다. 벚꽃 원산지는 그냥 지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게다가 원산지설은 여전히 논란중이다. 국내에서는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아니다. 왕벚꽃이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언제 어떻게 건너갔다는 것인지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여기에도 내셔널리즘이 작용한다. 한국 식물학자들은 제주도 원산지설을 정설로 받아들이지만 일본 식물학자들은 오오시마 벚나무와 에도히간 벚나무의 교배설을 주장한다. 벚나무의 종류는 왕벚나무, 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등 20여 종류에 이른다. 그러나 생김새가 비슷비슷하여 좀처럼 구별할 수 없다. 이들은 너무 닮아서 오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도 헷갈린다. 따라서 우리나라 원산인 제주도 왕벚나무만을 골라 심어도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일본의 '사쿠라‘로 보일 따름이다. 결국 온 나라를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벚꽃 천지로 만들어주는 셈이다. 구차한 원산지 논리로 벚나무 심기를 고집하지 않아도 우리 땅에는 아름다운 꽃나무가 얼마든지 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미선나무를 비롯하여 이팝나무, 노각나무, 개살구나무, 야광나무 등은 결코 벚나무에 뒤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개발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쿠라는 꽃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이다
 
해방 후 한때 벚나무를 베어내는 일까지 있었으나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오히려 장려하는 꽃이 되어 버렸다.그렇다면 과연 무슨 근거로 벚나무를 무궁화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가꾸고 있는가? 이는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 한라산이라서 우리의 꽃이므로 일본 꽃으로 알고 경원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논리 때문이다. 하지만 원산지란 식물학적으로 값어치는 클지라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당위성을 찾기는 어렵다. 무궁화의 원산지는 우리나라가 아니지만 국화로 선정된 것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일본인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국인들이라 하여 오늘날 일본인을 한국인이라하지 않고 임진왜란 과 일제36년을 환영하지 않는다. 무궁화 원산지는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한국전쟁당시 통일의 찰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한민국을 분단국으로 만드는데 1등공신인 중국이다.

애당초 우리나라에는 벚꽃놀이가 없었고, 벚꽃(사쿠라) 축제 자체가 일본문화의 상징코드로 오늘날 봄철 문화로 벚꽃놀이가 대두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처럼 벚꽃을 감상하였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자두와 복숭아, 매화꽃은 시와 노래로 즐겨 읊었지만 벚나무는 꽃이 아니라 껍질을 벗겨 활의 재료로 사용하였을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이전의 글에 벚꽃을 노래한 시나 글 한편이 없는 것으로 유추해 볼 때 벚꽃 문화는 우리 문화와 거리가 멀다.일본사람들은 벚꽃에 대해 집요하고 열광적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궁화를 나라꽃(國花)이라고 하면서도 국민들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옛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던 벚꽃을 즐기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하나미(花見)’라불리는 그들의 문화가 전해지면서부터다. 1906년경 진해와 마산 지방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심기 시작하여, 저들의 대륙침략 전진기지로 진해를 군항으로 개발하면서 집집마다 거리마다 벚나무로 단장하였다. 한일병탄이후 벚꽃은 방방곳곳에 차츰 자리 차지했다. 급기야 남의 나라 왕궁인 창경궁에다 동물원을 만들고 벚나무를 줄줄이 심어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 한 것이다. 벚꽃놀이 자체가 일본문화다. 설령, 백번양보해서 제주도 원산지가 맞다고 하더라도 사쿠라 축제(문화제)의 원산지는 일본이 1200년 전부터 해오던 100% 일본문화 ‘하나미(花見)’라불리는 그들의 문화다. 벚꽃축제는 생물학적 특성이 아닌 문화적 특성 이다. 문화적인 벚꽃놀이 원산지는 엄연히 일본이고 그 문화는 군국주의와 맞닿았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하자 제일 먼저 고종이 사는 궁궐앞에 사쿠라를 가져다 심고 고종에게 보란듯이 뽐내었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축제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우리를 일본의 보수우익이 어떻게 보겠냐. 결국 나를 파는 행위다. 이는 결국 우리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일본은 과거 벚꽃마저도 제국주의 정책 수단으로 정교하게 활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활용하는데 그들이 기증한 벚꽃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봐도 괜찮은지, 그러는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한번쯤 생각해길 바란다. 지자체 와 정부 차원가 벚꽃에 목을 메머 벚꽃 축제가 지역 연례행사로 자리잡은 현실, 벚꽃이 꼭 문제라고는 보지 않지만, 왜 하필 벚꽃이 지천으로 깔리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심는 가로수의 대부분은 제주도 원산이라는 왕벚나무다. 이렇게 가다 보면 우리나라는 오래지 않아 온통 벚나무 천지가 되기 십상이다. 오늘날 벚꽃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으로 보아 꽃이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망쳐놓고 조금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대표 꽃, 벚나무 심기를 계속하여 할지 깊이 생각해야 보아야 할 과제이다. 더욱이 우리 문화가 서려 있는 천년고도 경주, 유명사찰 등 전통 문화유적지까지 벚나무로 뒤덮은 것은 당장이라도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효창공원 상해임정 요인 무덤과 독립운동가들무덤 백범 김 구 선생 무덤 당신은 가보았는가?  현재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 구 묘 주변에도 사쿠라가 심어져있고 임정요인 무덤 주변에도 사쿠라가 심어져있다. 친일매국노들에게 농락당해 쇠락한 그 곳에는 꽃한송이 놓여져 있지 않은체 사쿠라에 놀림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시에 세워진 위안부 추모비에 대해 일본이 철거를 요구하면서 벚나무 기증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과거사를 덮는 조건으로 벚나무를 선물하고 일본은 여전히 벚꽃을 군국주의 연장선에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은 지난해 봄 미국 뉴저지의 위안부 추모비 철거를 요구하면서 벚나무 기증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日, 벚꽃 기증 조건으로 위안부 기림비 철거 요구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52217090564335&outlink=1

최근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시에 세워진 위안부 추모비 철거를 요구하면서 일본이 벚꽃 기증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과거사를 덮는 조건으로 벚꽃 나무를 선물하겠다는 말이다.
우리는 벚꽃을 꽃으로 볼지 몰라도 일본은 다른뜻으로 본다.


 구로다 가쓰히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다른 곳은 몰라도 국회 주변은 신중히 생각했어야 하는 문제라고 본다” 라는 기사다.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3/04/18/20130418004687.html

우익적인 일본인 눈에도 한국의 국회 벚꽃길은 자연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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